할아버지 땅과 나를 연결해준 이대표에게 연락을 하였다.
알고 보니 도로에 주인이 있더라구요 말씀드리니 아예 모르는 사실이라 하셨다. 도로의 주인이 우리가 산 땅 앞부분에 근래 지어진 것 같은 잘 지어진 전원주택에서 살던 사람들이고 내 추측대로 모녀 사이였다. 연락을 취해달라고 이대표에게 요청하였다. 이대표는 크게 걱정하지 말라며 사람들 좋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이 사람들로부터 도로에 붙어 있는 땅을 샀던 것이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봐왔던 사람들이라 세월이 쌓여 서로 번호도 알고 이름도 알고 각각의 개인적인 사정도 아는 것이었다.
좋고 나쁘고는 만나보고 난 뒤 판단을 해야 하므로 아 예.. 그러시냐 하면서 약속을 잡았다.
우리 땅의 시내 터미널의 동네 커피 가게에서 만나서 인사를 나눴다.
60대 초반의 여성으로서 그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아주머니 인상이었다.
그 도로는 원래 도로에 붙어 있는 땅에 사연이 있다 했다.
그렇다. 사연 없는 토지가 없다.
사람과 땅은 평생이 연결되어 있어 땅 위에, 길 위에 이야기가 쌓인다. 그래서 땅에는 주인이 있다. 라는 말을 믿는다.
그녀는 우리에게 도로가 덩그러니 이상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땅은 저희 어머니 것이에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땅을 수용하겠다고 OO시에서 왔는데 그때 어머니가 아프셔서 연락을 못 받고 그랬나봐요. 그러다가 세월이 흘렀고, 도로와 같이 붙어있던 땅에 저희가 어머니 모시고 살려고 집을 근사하게 지었던 거구요. “
아… 그러하였다. 우리가 추측했던 여러가지 답변 중 하나였다. 수용하려고 했던 시기에 하지 않았던 것. 그러는 와중에 우리 일 많은 노부부에게 전원주택 부지를 판매하려고 했단다. 물론 도로도 함께.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 말썽쟁이 노부부는 우리가 여기에 공장을 지을 거라면서 사겠다 라고 답변만 한 뒤 2년을 넘게 시간을 끌었다고 한다. 박희정씨는 어머니를 모시기도 해야하고, 개인 사정으로 인해서 더 공기가 좋은 곳으로 갈 필요가 있어서 빠르게 전원주택과 부지를 팔고 싶었다고 했다.
노부부가 공장을 지으면 근처에 지낼 곳이 필요하니 이 전원주택을 사용하겠다고 했단다. 그녀는 그 말을 믿었다. 우리처럼.
자기가 입 밖에 낸 말이 진실이고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상대방도 으레 그럴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그렇다. 내 주변은 그렇다. 아무래도 사업을 하다보니 말에 있어서 신중해지는 것 같다. 도와주겠다. 뭐뭐 하겠다. 라는 말을 하면 해야만 하는 것이다. 박희정씨도 그러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노부부는 아니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될 상황이 왔어요. 제가 뇌종양이 생긴 거에요. 제가 6남에 장녀인데.. “
박희정씨는 6남매에 장녀로서 일찍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이 지역에서 어머니가 농사, 허드렛일을 하면서 6남매를 키울 때 동생들 공부시키고 먹여 살린다고 열심히 일을 한 것처럼 보였다. 6남매지만 5남매가 되었다 했다.
막내 여동생과는 나이 차이가 좀 났는데, 여동생이 갑자기 숨을 못 쉰다고 하더니 그 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일산에서 거주했었을 때였는데 근처 이O병원 응급실을 갔는데.. 의료사고로 보이지만 어떻게 해야하는 줄 몰랐다 했다. 20대 초반의 나이. 그리고 어머니는 한동안 실어증이 왔었다고…
어머니에게 장녀이자, 친구이자, 남편이었고. 그건 지금도 그래요. 어머니는 제가 시집가는걸 원치 않았어요. 저도 가정을 꾸리고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게 두려웠었나 봐요. 그래도 남편 덕분에 어머니 모시고 여태 잘 살고는 있어요… 그러다가 도로 수용도 놓치고.. 주택은 빨리 팔아야 하는데 저 쪽은 말만 하고 행동은 취하지 않고. 말 바꾸고.. 참…
그녀의 몸에는 한계가 왔었나보다. 8년전 스트레스였는지 픽 하고 어머니 앞에서 쓰러졌는데 뇌종양이 자라나고 있었다 했다. 수술하기엔 매우 위험한 자리라서 경과만 보면서 더 크지 않게만 바라고 있다 했다.
어머니에게는 장녀로서 효녀여야 하고, 어머니의 아들. 그녀의 유일한 남동생은 사업하다가 크게 사고쳐서 빚까지 져서 그 몫까지 그녀가 다 케어 해야 했고. 여동생들 뒷바라지에,,, 그래서 그녀의 딸 둘은 엄마가 외가집 가는 걸 싫어하고, 명절에도 찾아가지 않는다 했다. 그걸로 미루어 보아 얼마나 그녀가 착하게 살아왔는지. 남이 보면 얼마나 홀로 남은 그녀의 어머니 곁에서 위로를 하며 지내왔을지 뻔히 보였다.
주택을 어찌저찌 손해를 보고 팔고, 산 속에서 집을 짓고 그 곳에 어머니를 모시고 남편과 살고 있다 하였다.
계속해서 봉사활동을 나가고 있는데, 힘듦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그래도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도우며 나는 아직 살만하다. 내가 가진게 많다라고 느껴서라고 …자기의 이 피곤함을 알리려면 온 가족 있는데에서 죽어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무게감으로 살아온 장녀의 어깨가 보였고, 슬픈 기운이 느껴졌다.
자신의 삶으로만 온전히 사는 것은 복인 것 같다. 내가 느꼈던 이 땅의 문제점들은 그녀 앞에서 참 작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하고 애들 키우고 세월을 살아왔고. 엄마가 노쇠하셨을 때도 케어하고 평생을 엄마와 동생들. 사고치는 유일한 장남의 돈 문제까지 겹쳤어요… 그래도 김장하면 주변 어려운 사람들 다 나눠주고.. 그 동네에서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굳이 떠난 이유는 아직도 그 동네에서는 아버지를 기억하더라구요. 누구누구의 딸. 누구누구의 아내. 이렇게 살아야 하니 엄마도 저도 피곤하더라구요. 그래서 이사를 좀 일찍 했는데 아버지가 남겨둔 땅을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니 나이 들고는 일산에서 다시 이쪽으로 내려와서 집 짓고 살았어요.
뇌종양은 6개월에 한번씩 MRI, CT 체크를 하고 있고, 어머니보다 하루만 더 살게끔 해달라고 기도한다 했다. 어머니 케어는 제가 다 하고 가야하니까…
80대의 어머니. 그리고 60대의 큰 딸.
박희정씨는 어머니를 돌보며 평생이 스트레스 였을텐데도…. 엄마를 사랑함이 느껴졌다.
엄마가 아빠를 떠나보냈을 때 39세였더라구요. 제가 39세가 되었을 때 참 많이 울었어요. 엄마가 참 외로웠겠다. 6남매를 키울 무게감과.. 여자로서의 39세. 그리고 지금까지도. 자녀들 때문에 그 당시에는 재혼도 꿈도 못 꿨을 거에요.
지금 이사한 곳은 산 속이라 아무도 방해를 하지 않아서 새벽이 되면 뒷 산에 가요. 가면 소쩍새가 그렇게 구슬프게 우는데 저도 그 때 엉엉 같이 새와 웁니다. 서서 울기 힘들어서 남편한테 벤치 하나 만들어 달라했어요. 남편이 만들어준 곳에 이제는 앉아서 울어요 하면서 살며시 웃으셨는데 그게 그렇게도 가여워 보였다.
토지 관련해서 우리 회사에 팔기로 했고 싸인까지 한 상황이었고. 서로 원하던 가격에 별 탈 없이 조율을 하였다. 인감도장이 없어서 불안했지만, 말을 바꾸는 사람처럼은 절대 안보였다. 그 돈은 엄마를 케어하는데 쓸 것이라 했다. 재산세를 내는 것보다 필요한 사람이 잘 쓰는게 낫지요란 어머니의 말을 전해 주었다.
인감도장 찍힌 서류와 인감증명서는 추석 이후에 받기로 했다.
이 땅에 이리도 많은 사연이 있고 일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드디어. 인허가를 신청할 수 있다.
어떠한 공장을 지을 것인지 … 많은 서류를 작성해야 할 차례다.
모든게 쉬워 보인다는 것. 삶이라는 건 앞에 놓여진 축구공을 그저 차서 나갈 뿐이라는 것. 숙제를 하나하나씩 하다보면 답이 나온다는 것.
도로를 사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온 날이었다.